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공공추도 독본(초등학교판)

2014-09-17 09:32:55 출처: 신화망 한국어판

   샤오산링 창장가에서 희생되다   

   독서 안내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뒤 수저우(蘇州), 우시(無錫), 장인(江陰) 등 지를 정복하고 군대를 여러갈래로 나누어 난징으로 향했다. 샤오산링(蕭山令)은 위험과 재난의 시기에 명을 받고 난징 헌병사령부 대리 사령 겸 경비사 사령부 방공사령과 난징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어 부대를 인솔해 난징 보위전에 뛰어들었다. 군민을 엄호해 도강, 퇴각하면서 그가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저지전에 나섰으며 치열한 전투에서 몸에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샤오산링 장군   

   정보연결   

   1937년 8월 15일, 일본군이 난징에 첫 공습을 감행해서부터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되기까지 연속 공습해 오는 일본군 전투기를 대응하기 위해 중국 공군은 근 4개월 간 지속된 난징 공중 보위전을 치뤄냈다. 수많은 중국 공군 비행사들이 난징을 보위하기 위해 영용하게 희생됐다. “강남대지의 철모”로 불리는 웨이친(樂以琴)이 바로 그중 한명이다. 

   12월 3일, 일본군의 30여대 전투기가 난징을 침범했다. 웨이친과 전우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적을 맞았다. 이는 한차례의 비장한 전투였다. 수적 우세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 전투기의 맹렬한 화력 속에서 웨이친이 십여대 일본 전투기에 겹겹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조종 기술로 한번 또 한번 적기가 헛물을 켜게 했고 적들이 서로 부딪쳐 사상을 빚어내게 하기도 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은 상황에서 웨이친의 전투기는 물탱크, 연료 탱크에 총탄을 맞고 짙은 연기와 함께 추락했다. 그는 부득불 전투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적들의 탄알받이 신세를 피하기 위해 뛰어 내리는 순간 낙하산을 펴지 않고 수직 하락했지만 낙하산을 펴려고 할 때즈음 이미 착지하게 되어 23살의 나이로 장렬하게 희생했다.

   웨이친이 희생한 뒤 그의 사적은 중화민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편입되었었다. 항일 전쟁이 승리한 뒤 상하이롄화(聯華)영화제작사에서 그의 사적에 근거해 “장공만리(長空萬里)”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2011년, 화이(華誼)에서 또 고즈항(高志航), 웨이친, 류추이강(劉翠剛), 선충하이(沈崇海) 등 항전 시기 공군영웅들의 이야기로 30부작 드라마 “멀어져간 비응(遠去的飛鷹)”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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